#1. 나는 고3들에게 고급수학과 EBS수능특강을 가르치게 됐다. 처음하는 고등학교 수업인데다 과목도 영 특이한 것들이라 이런저런 고민이 있었다. 
수능에도 안나오는 고급수학을 애들이 왜 들어야 하나? 특히 정시만 생각하는 애들은?
수특은 문제만 풀어주면 되나? 아니라면 뭘 더 할 수 있나? 
입시 체제 안에서 내가 학원 강사들보다 더 도움이 될 수 있는,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 뭔가? 적어도 학교 선생으로서 그네들과 다를 수 있는 방법은 뭔가? 등등등.


#2. 고민해봐야 답은 없고, 그래서 일단 지금껏 배운대로 굴러보기로 했다. 교육과정 재구성과 배움중심, 학생중심, 뭐 그런거.


#3. 고급수학은 1에서 벡터공간과 행렬, 연립방정식, 그래프이론을, 2에서 극형식/극좌표, 미방, 테일러정리, 적분의 활용, 편미분 등을 배운다. 그리고 보통 1학기에만 고급수학을 다루고, 2학기엔 수능 준비를 시킨다 한다. 예년엔 고수1의 내용을 1학기에 다 다루었다고 한다. 

교과서를 훑어보니 내용은 많은데 깊이나 연결성은 잘 안보인다. 아마 애들 수준 생각해서 그랬겠지 싶다. 그래서 나는 애들이 고급수학을 교양수준에서 받아들이면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차피 교양수준에서 다룰 거면 대학 미적분과 선대의 내용에 좀 더 초점을 두자 싶었다. 그래서 고수에서는 벡터공간-행렬과 연방-극좌표계-테일러급수 정도를 다루기로 했다. 극좌표와 테일러급수는 컴퓨터를 좀 쓸까 싶다.


#4. 한 주 쯤 수업을 했다. 실제 고수 수업은 강의가 중심이다. 일주일에 1번만 다룰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 책을 중심으로 하지만 가능하면 대졸자의 입장에서(?) 이런저런 해석을 덧붙이면서 하고 있다. 가령 벡터가 아니라 벡터공간을 다루는 건, 우리가 무언가 수학적인 대상을 배울 때 처음에는 그 대상의 연산 자체에만 주목하다가, 점차 그 연산이 주어진 대상들의 집합의 성질에 관심을 돌리기 때문이며(초딩땐 자연수 덧셈을 하다가 중딩땐 교환법칙을 말하듯이), 이렇게 해두면 대상이 바뀌더라도 그 집합에 대해 연구한 걸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라던가, 행렬을 배우는 의의는 이걸 통해 여러가지 수학적 상황에 대한 표현법을 배우는 데 있다던가(물론 자의적인 해석이지만, 다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뭐 그런 얘기들. 교양이 충만한 고3을 만드는데 주력하고 있다.


#5. 수특은 아무래도 문제풀이가 중심인데, 문제를 안풀어주기로 마음 먹었다. 레벨3의 문제만 다루는데, 5분 정도 개념 리뷰-10분 정도 개인적인 풀이-10분간 친구들과 떠들며 풀기- 학생에 의한 풀이 정도로 진행하고 있다. 굳이 풀이를 해주지 않는건 내가 말을 할 수록 애들이 머리굴릴 시간이 줄고, 고3쯤 되면 풀이의 노하우들이 나보다 더 훌륭한 경우가 종종 있고, 나는 하지 않는 실수를 발표자 애들이 하면 그것 나름대로 산 공부가 되고, 좋은 풀이와 발표를 하는 게 현실적으로 수리논술을 위한 훈련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중딩들 가르칠 때와 별 차이없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지켜보고, 질문하고, 이해되냐고 물어보고, 특이한 풀이를 쓴 애들을 찾아 발표시키는 정도를 한다. 한 시간에 3문제 정도를 푸는데, 아무래도 조금 버거운 애들이 있지 싶어 조만간 2문제로 줄여볼까 싶다. 모든 학생들이 레벨3을 풀 수 있는게 목표라, 조금 천천히 갈 필요가 있다.

#6. 그래서 생각보다 고등학교 수업은 재밌다. 수업시수가 적은게 아쉬운 느낌. 수특이라는 공식(?) 교재가 있으니 활동지를 굳이 만들기보단 주어진 자료를 알차게 울궈먹자는 느낌이라 부담도 적다. 물론 애들의 만족도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답게 수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조만간 수학동아리(컴퓨터로 문제를 시각화하기 - 기벡 문제 그림을 3D로 그려서 푸는게 주 활동이 될거다)와 방과후 수리논술반도 돌려볼까 싶다. 야무지게 해야지.

#7. 글을 보시는 분들에게: 혹시 고등학교 수업 노하우나... 어떤 수업이 좋았다거나... 하는 게 있으면 글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교 수학선생 쪼렙이라(?) 이것저것 벤치마킹해야 합니다.


수특을 풀던 장면. 왼쪽 문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방법의 풀이를 발표시켰고, 오른쪽은 애들이 어려워 하는 부분만

발표 시켰다. 


Posted by Oh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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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3.17 09: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 Oh 선생 2018.03.18 04: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아, 아이들 잘합니다. 비평준화 자공고라 반마다 다르긴 하지만 1~4 등급 내에 대부분 들어옵니다. 그러다보니 첫째는 놓치는
      사람 없이 모두 풀 수 있을 것, 둘째는 답을 맞추는 것 자체보다 풀이를 섬세하게 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수준이 다양하다면 레벨2, 레벨3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의미있는 문제를 의미있게 푸는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굳이 모든 문제를 다 풀어줄 이유도 없을 것 같구요(저흰 6월 모평까진 책을 마칠 예정이라 더 빨리 나가야하기도 해서...--;)